5일 째의 아침이 밝아왔다. 3개월동안의 언어공부 겸 여행을 한 이후로 정확히 3년만이다. 그 때도 난 런던의 여름 만을 경험하고 돌아갔다. 그때 난 여러면에서 지쳐있었고, 졸업전시와 졸업 후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으로 그저 쉴 공간이 필요 했었다. 적당한 거리감을 지키는 런던 사람들은 도쿄 사람들과 닮아있었기에 적응하기에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오히려 시도때도 없이 가장 깊은 곳까지 폭로 시키려는 – 정이라는 이름으로 – 한국과 다른 그 점이 매우 편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새로웠던 그 기간, 새로운 색감의 공간과 신선한 환경에 매우 강하게 매료 당했다. 그 3개월의 경험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3년 후 뉴욕이 아닌 런던 이라는 공간을 다시 선택하게 만들었다. 당시 런던의 행복감은 뉴욕의 모든 것들을 퇴색시켰다. 신선하고 묵직한 맥주도 씁쓸하고 느끼한 커피도 뉴욕보다 나아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뉴욕에서의 외로움은 아마도 익숙해져 버린 것들이 한꺼번에 빼앗겨지고 엉뚱한 사람들과 엉뚱한 환경에 버려졌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도 날씨도 뉴욕과 런던은 너무나도 달라서 이미 와본 적 있던 뉴욕이라 할지라도, 나에겐 다시 한번 생소한 공간으로 느껴졌다.
런던과 뉴욕 두 공간 모두 3개월 만의 경험을 가지고 다시한번 돌아갔던 공간이다. 뉴욕에서 3개월 어학연수동안 만났던 친구들과의 경험이 너무나도 좋아서 뉴욕으로 대학원을 가려고 결심하게 되었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 뉴욕은 전혀 똑같지 않았다. 그리운 친구들도 없는 채로, 뉴욕의 비릿하고 맑은 도시의 향만이 날 반겨주었다. 뉴욕은 변하지 않은 상태로 계속 그곳에 있었지만, 졸업작품의 정신적 스트레스로 지쳐버리고 수 개월동안의 한국 생활에 익숙해져 버린 내 몸은 뉴욕을 거부했다. 같은 어학교 임에도, 내가 알던 선생님들도 내가 알던 그 누구도 그곳에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난 돌아온 것 이었을까? 돌아오면 누군가는 날 반겨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1년반의 어학준비와 영어 시험 준비의 기억은 현재의 나에게 여전히 고통으로 남겨져 있다.
과연 런던은 뉴욕과는 다른 흐름을 보여줄 것인가? 이제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현 시점에서 그런 걱정들을 시작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라는 생각도 있지만 그럼에도 기억들이 나의 움직임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한번의 실패했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번의 외로웠던 기억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슬펐던 기억들은 즐거웠던 기억 들보다 더 강하게 마음 속에 각인된다.
여름임에도 다소 춥고 습기있는 날씨와 하루종일 구름에 가려진 푸르른 하늘은 무엇보다 날 가장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개인적 성향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표정에 많은 억측을 하는 나에게 차갑고 표정의 변화가 없는 런던 사람들의 겉모습은 날 겁먹게 했다. 물론 많은 도시의 사람들이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대다수가 개인적인 부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높다. 나 또한 일본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상냥한 표정과 다소 과장된 행동들로 친밀을 가장해서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친한 친구인 것 처럼, 그리고 언제든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줄 것 처럼.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첫 수업의 하루가 지났다. 그동안 난 물을 한번 배달 시켰고, 추위에 지쳐 자켓을 주문했으며 한국에서는 먹지 않았을 인스턴트 커피를 마셨다. 사이더를 반주로 마시고 친구를 중심가에서 만났다. 영화도 봤고 맛이 없음에 치를 떨며 블루베리를 먹어치우고 있다. 키즈메뉴에 있는 햄버거를 시켜먹으며 키즈용 번이 있는 것이 아닌 성인용을 잘라서 따로 만드는 그 모습에 놀랐다. 왕좌의 게임을 완주했고 수많은 팝콘들을 먹어치웠다.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빨리 흘러가고 혼자있음에 익숙해져 가는 내가 두려울 정도였다. 책을 보고 싶었고 작업을 다시 하고 싶었지만, 적응기라는 변명이 나를 계속 잡아눌렀다.
5일이라는 시간이 걸려 이 글을 작성하면서, 하루에 1시간씩 글을 쓰자는 내 결심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것 또한 변명의 변명이 줄을 이어 가는 내 모습인 것만 같아 조금은 서글퍼 졌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많은 것을 준비한 것 같아보이지만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는 내 모습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되는 것만 같았다. 내 작업도 내 졸업작업도 설명하기에 어려움을 느끼면서 도대체 어떻게 나란 인간이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지 다른 이들에게 어필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멋진 사람이고 넌 나를 알고 싶어하게 될거야라는 주문 같은 말들을 매일 매일 되뇌이며 사실을 아님을, 많은 이들을 또 다시 이렇게 스쳐보내고 있음을 느낀다.
내일은 다르기를
오늘은 다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