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cault’s Essence in Deleuze

Only in Korean, English will be posted later.

Keywords

  • Density of Bodies
  • Incorporeal (Stoic)
    • Thinking = object of thought
  • Phantasm (Freudian)
    • thought is itself capable of thought freed from subject and the object
    • Repeats thought
  • Event
    • thought-event = singular as a throw of the dice

Foucault’s Deleuze

우연히 찾게된 알라딘의 한 우연히 찾게된 알라딘의 한 리뷰, 람흔이라는 이름으로 쓰여진 이 글에는 푸코와 루셀에 관한 이어짐 그리고 루셀에 대한 중요성을 알아본 들뢰즈에 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적혀있다. 그는 푸코가 극히 적은 경우에 한하여 문학에 관하여 논의하였지만 루셀에 대한 논의의 중요성을 매우 적은 사람, 들뢰즈와 마슈레(Macherey) 만이 알아보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푸코는 들뢰즈에 대해서 무엇을 알아보았을까?

일단 푸코가 들뢰즈의 두 책에 대해서 쓴 철학 극장 이란 글에서 Logic of Sense 에 대해서 쓴 부분을 읽어보자. 푸코는 철학에서 오랜 시간동안 이벤트와 phantasm 환영이 경시되어왔다고 이야기한다. 이벤트는 개념과 동화되었고 사실의 형태로 추출되었으며 그 사건은 개념에 동화되었고, 실제 경험, 주체의 양식, 구체성, 경험적 역사의 내용에 의한 서술로 증명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반면 환영은 실재라는 이름으로 축소되었고 극단으로 위치되었으며 환상은 현실의 이름으로 감소되고, 극한, 즉 병리학적 극, 규칙적인 연결 sequence,에 위치하게 되었다: 지각-이미지-기억-환상. 문득 든 생각은 phantasm이라던가 요즘 한창 떠오르고 있는 (혹은 이미 지나간) hauntology 라던가 또는 들뢰즈의 immanence, 하이데거의 ground 모두 어느 정도 그리스의 사상을 이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물론 데리다의 hauntology는 현재 디지털과 연동되어 다른 의미로 변화하고 있고 하이데거의 ground는 여러모로 하이데거의 이름만 빼고 흡수 되어버린 듯하지만 어느 지점에선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동양의 사상이 기나 음과 양과 같은 세상에 대한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물론 이것이 동양의 것만은 아니지만, 서양 철학 안에서 어떠한 이미지가 공유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19세기 이후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프로이드와 마르크스, 푸코는 들뢰즈가 프로이드와 마르크스 혹은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라는 슬로건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 아닌 이벤트와 환영을 함께 이접적 진술 disjunctive affirmation 을 가능하게하였다고 주장한다.

Illusion and Phantasm

형이상학은 오랜 동안 스뮬라크럼에 대한 공포로 환영이 형이상학을 언제나 쫓아왔다. 형이상학은 환상이 아니었지만 환상은 형이상학이었다. 환상은 형이상학 중에서도 특정한 형이상학이 시뮬라크럼의 한 쪽과 오리지널 그리고 다른 쪽에는 완벽한 복제를 분리시킨 것에서 생성되었다.

환상 = 시물라크럼/오리지널 + 완벽복제

그러나 들뢰즈의 형이상학은 판타즘의 각정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다 그를 통해 들뢰즈는 더이상 하나의 신을 찾는 형이상학이 아닌 신의 부재와 표면상 (표피상의) 도착적인 놀이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

Logic of sense, EVENT

푸코가 읽는 들뢰즈로 돌아가보자. 솔직히 말해서 푸코가 말하는 들뢰즈는 매우 이해하기 힘들다. 그에 따르면 들뢰즈는 플라톤의 에센셜리즘을 마주하며 형이상학의 extra를 읽는 방식으로 에센스가 되기 전 프로세스에서 에센스로 뭉처지기 전의 assemblage에 주목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러한 집합은 유령들을 통해 유기체의 표면을 구성한다고 이야기 한다. proposition 속안에 위치할 수 없는 이벤트 혹은 동사처럼 그것은 유기체로 형성된다. 이러한 들뢰즈의 생각은 푸코가 보기에 스토아 학파의 비물체 incorporeal 과 프로이드의 환상에 대한 분석에 영향을 받았다고 여긴다.

이벤트는:

  1. 단단한 신체의 한계에서 이벤트는 비실체적이다. (하나의 형이상학적 표면이다.).
  2. 말과 사물의 표면에서, 비실체적인 이벤트는명제의 의미이다. (논리적 차원에서)
  3. 담론의 맥락에서, 비실체적인 의미-이벤트는동사에 고정된다. (부정사 to+ 로의 현재)
    (175)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푸코가 말한 세가지 방식의 이벤트에 대한 해석 방식이다. 첫번째로 Neopositivism (논리실증주의, 형이상학적인 사변을 배척 하고 과학적 탐구를 주장한 19세기 철학), phenomenology (현상학), 그리고 역사 철학이 있다. 논리실증주의는 논리적 에러로 인해 이벤트의 특징적인 부분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벤트와 물질의 상태를 혼동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벤트를 물질적 과정으로 생각했고 물리주의와 연결시켰다.

  • 논리실증주의:이벤트=속성(attribute)

현상학의 경우 이벤트를 의미에 관련되어 방향을 재위치시켰다. 맨 이벤트를 의미의 전 혹은 그 옆에 위치시켰다. (돌의 사실성, 발생의 묵음의 관성) 그리고 그것을 의미의 과정 안으로 제안했다. 혹은 주요 의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자아의 주변에 존재하는 세상의 배치로 존재했다.
현상학의 이러한 지점은 분명 공간적인 이해로서의 이벤트이다. 그것은 주변이며 peripheral around or side. 즉 미소보다 앞선 고양이가 가진 감각이라던가 고양이를 예상하게 하는 공통 감각적 미소 처럼. 사르트르나 몽티에게 있어서 이벤트는 의미와 함께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역사 철학의 경우 이벤트를 시간의 원형 패턴으로 닫았다. 역사 철학의 오류는 문법적이었다. (Nietzsche, I, 13) 그들은 현재를 과거와 미래 안에 프레임된 것으로 보았으며, 현재는 그 형태가 준비되고 미래에 일어날 과거는 그 내용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이전의 미래입니다. 이러한 현재에 대한 감각은 에센스에 대한 논리 (현재를 기억안에 확립시킨다)와 개념(현재가 미래의 지식으로 확립된다)을 필요로 하고, 그 다음에 계층적 세계의 왕관적이고 일관된 우주의 형이상학을 요구한다. 즉 계층적인 세상을 요구하게된다.

따라서, 논리실증주의, 현상학, 역사철학 보두 이벤트를 이해하는데 실패한다.

  1. 첫째는, “세상 바깥”에 놓여 있는 것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핑계로, 사건의 순수한 표면을 거부하고, 그것을 세계의 구형적 도량으로 억지로 감싸려 한다.
  2. 둘째는, 의미가 의식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핑계로, 사건을 바깥과 앞, 또는 안과 뒤에 배치하고, 항상 자아의 원과 관련하여 그것을 배치한다.
  3. 셋째는 사건이 제때만 존재할 수 있다는 핑계로 그 정체성을 규정해 확실하게 중심화된 순서에 따라 제출한다. 세계, 자아, 그리고 신: 항상 사건을 모호하게 하고 성공적인 사상의 형성을 방해하는 세 가지 조건.

델루즈의 제안은, 오늘까지, 이 사건에 부과된 이 세 가지 주제를 해제(lifting)하는 것으로 향하고 있다. 즉, 비실체적 이벤트의 형이상학 (세계물리로는 환원되지 않는), 중립적 의미의 논리 (현상학적 주제에 의한 어의가 아닌), 그리고 현재부정사 (present infinitive) (과거의 에센스에서 솟아오른 개념적 미래가 아닌)

Deleuze’s proposals, I believe, are directed to lifting this triple subjection which, to this day, is imposed on the event: a metaphysics of the incorporeal event (which is consequently irreducible to a physics of the world), alogic of neutral meaning (rather than a phenomenology of signification based on the subject), and a thought of the present infinitive (and not the raising up of the conceptual future in a past essence). (176)

이벤트는 환상의 연속으로 부재 속에 존재한다. 오리지널의 부재, 모든 모방 형태의 밖, 유사성의 similitude 제약에서의 자유, 그러한 부재의 반복으로 이벤트는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이벤트는 반복 속에 존재하는 위장이며 단일성의 가면으로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위장하지 않는 시뮬라크라, 존재하지 않는 나체, “순수한 차이” 이다.

Logic of Sense 는 푸코가 보기에 어떻게 이벤트와 컨셉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지 또한 그 둘의 이중 진술, 진술의 분리를 보여준다고 여긴다. 컨셉을 통해 어떠한 연속의 중요성도 부정하며 이벤트를 확정하는 것, 이것이 아마도 ‘안는 것’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환상을 현실과 비교하여 측정하고 그것의 오리진을 찾는 것.

환상과 이벤트, 생각하는 물체 (le pense, the thing being thought) 와 생각 그 자체 (la pensee)

Deleuze and Pluto

But Deleuze locates Plato’s singularity in the delicate sorting operation which precedes the discovery of essence, because it necessitates the world of essences in its separation of false simulacra from the multitude of appearances. (167)
But Deleuze locates Plato’s singulariry in the delicate sorting, in this fine operation that precedes the discovery of essence precisely because it caIls upon it, and tries to separate malign simulacra from the masses [peuple] of appearance. (39)

이러한 들뢰즈의 시작점은 플루톤이다. 더 자시히 말하면 플라톤의 반대편 스토익 학파, 에피쿠로스와 제논에 대한 그의 대화, 루크레티우스와 크리시퍼스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프로이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푸코는 이야기한다. 또한 푸코는 들뢰즈의 “reversed Platonism” 을 이야기하며 (Foucault, 167) 카테고리로 사냥꾼, 목수 등과 같이 분류 했던 소크라테스와 다르게 플라톤은 pure gold, 즉 에센스를 찾고자 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떻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것인가? 어느 것이 에센스인지 어떻게 알아 볼 것인가?

Certainly not by discovering a law of the true and false (truth is not opposed to error but to false appearances), but by looking, beyond these manifestations to a model, a model so pure that the actual purity of the “pure” resembles it, approximates it, and measures itself against it; a model that exists so forcefully that in its presence the sham vanity of the false copy is immediately reduced to nonexistence. With the abrupt appearance of Ulysses, the eternal husband, the false suitors disappear. Exeunt simulacra. (Foucault, 167)
분명 진실과 거짓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실은 오류의 반대가 아니라 잘못된 표현의 반대이다) 너무 순수해서 진정한 순수성의 “순수”가 그 모델을 닮고 유사하며 그것을 반대로 측정한 모델. 강력하게 그 스스로 안에서 존재하므로 무가치한 가짜 사본은 즉시 무존재로 환원되게 하는 모델, 그 모델이 명시하고 있는 것의 그 너머를 바라봄으로써. 영원한 남편 율리시스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거짓 구혼자들이 사라진 것처럼 그것은 시뮬라크라를 퇴장시킨다. (translation by myself)

플라토의 경우 보이는 것과 에센스를 반대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들뢰즈는 그 순수성 singularity 의 앞의 과정에 집중한다. 즉 에센스가 시뮬라크라에서 분리되기 전의 분류 작업을 하기 위해선 본질 적인 세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반대가 되기 위해선 appearance를 에센스의 지위로 그 위치를 올리거나 다른 에센스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오히려 우리는:

Rather, we should welcome the cunning assembly that simulates and clamors at the door. (168)

플라톤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위에서 부터 시작해 그 기원을 찾는 것이다. 또한 가장 작은 디테일을 찾는 것이다. 이후 푸코는 들뢰즈의 Logic of Sense 와 퐁티의 The Phenomenology of Perception 의 차이점을 비교한다. 예를 들어 퐁티에게 신체 유기체는 원시적 의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들뢰즈에겐 “phantasms”이 불가해하고 무형체적인 신체의 표면을 형성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여기에서 말하는 phantasms의 의미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푸코가 말하는 들뢰즈는 바로 이렇게 유령이 신체의 표면을 형성하는 과정과 동시적으로 위상적이고 cruel 이 형성되는 데 이것은 스스로를 거짓으로 중심적 유기체로 위치시키고 또한 스스로를 유기체의 외각으로 분표 시켜 “remoteness of things” 로 만든다. 푸코는 그로 인해 감각의 논리가 형이상학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을 지적하며무시하는 것이 아닌 형이상학의 추가적 extra를 이야기함으로 가장 무례하면서도 대담한 형이상학의 책이라고 주장한다.

Illusion is certainly the source of every difficulty in metaphysics, but not because metaphysics, by its very nature, is doomed to illusion, but because for the longest time it has been haunted by illusion and because, in its fear of the simulacrum, it was forced to hunt down the illusory. Metaphysics is not illusory—it is not merely another species of this particular genus— but illusion is a metaphysics.

다시말해 환상은 형이상학의 어려움의 근원이지만 환상 때문에 형이상학이 망해서가 아니라 환상에 의해 오랜 시간동안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시물라크럼의 두려움에 속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환상이 아니지만 환상은 형이상학이다.

Mouth

키프로스의 제논이 생각했듯, 입은 음식이 넘어가는 곳임과 동시에 의미가 지나가는 곳이다. 발화는 입, 구멍 orifice, the canal, 아이가 시뮬라크라를 발화하며 부분을 절단하는 신체가 없는 장기이다. 입은 깊이와 표면이 절단되는 곳이다 articulated.

The mouth where cries are broken into phonemes, morphemes, semantemes: the mouth where the profundity of an oral body separates itself from incorporeal meaning. (179)
입은 울음소리 (외침이)가 음소, 형태소, 의미소로 분해되는 곳이며: 입은 구강 신체의 깊이가 스스로를 무실체적 의미와 분리되는 곳이다..

사설

  • 이데아 = 나무의 정의, 직사각형의 정의 = 이데아, 정의 = 직사각형
  • 이데아를 알기 위해서 이데아의 이데아가 필요한 현상 즉 extra (examples) 들의 형성
  • 만약 이데가 혹은 에센스가 중심이 없는 환영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주변의 순수한 변형이 이벤트라고 한다면 영화는 순수한 이벤트의 환영이며 페인팅은 순수한 환영의 이벤트 이지 않을까?

FURTHER REFERENCE

  • Foucault, Michel. 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 Selected Essays and Interviews (Cornell Paperbacks). Edited by Donald F. Bouchard, Translated by Donald F. Bouchard and Sherry Sim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80.
  • Foucault, Michel. Death and the Labyrinth: The World of Raymond Roussel. Translated by Charles Ruas, Continuum, 2007.
  • Johnston, John. “Discourse as Event: Foucault, Writing, and Literature.” MLN, vol. 105, no. 4, 1990, pp. 800–818. JSTOR, www.jstor.org/stable/2905239. Accessed 19 June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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